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문단 편집) === 이에야스에 맞서다 ===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미츠나리는 반(反)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 이에야스를 제거하고자 한다.[* 반대로 이에야스 또한 미츠나리와 사이가 나쁜 무단파 인물들을 규합한다.] 이 당시에는 이에야스와 동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생존해 있어서,[* 히데요시 정권에서 이에야스의 무게는 압도적이었다. 고쿠다카 255만 석으로 휘하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고쿠다카 222만석을 보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보다도 영지가 넓었고 2, 3위인 고쿠다카 120.5만 석의 모리씨와 고쿠다카 120만 석의 우에스기씨를 합친 것보다도 컸다! 더군다나 군사력으로 따지면 더 심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력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다이묘들을 합친 것과 대등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된 이유라는 게 전투에서 패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어리석은 아들 [[오다 노부카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으로 붙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통성을 잃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뿐이지 싸움에서 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에다 토시이에가 도요토미 직계 영주들 쪽과 관계가 깊어 영향력 측면에서 이에야스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 물론 히데요시도 자기 가신들에게 영지를 뿌려서 히데요시와 가신들 전체의 합을 더하면 이에야스를 능가했기 때문에, 히데요시 생전에는 제아무리 이에야스라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히데츠구 일도 있고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도 있어서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반면 이에야스는 관동 경영에 성공하고 관서의 구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 일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인 영향력을 휘둘렀다. 그나마 마에다 토시이에 생전에는 일단 이에야스를 견제하기가 어떻게든 가능했지만, 그 마에다마저 사망한 뒤에는 히데요시가 남겨두었던 이에야스를 제어할 장치가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다. 사실 남겨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때문에 그 제어장치가 죄다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에서 자신의 영지까지 몇 겹의 방어선을 쳐두었지만, 그 방어선을 담당했던 자들이 대부분 히데츠구를 지지하던 세력들이라 히데츠구를 가혹하게 처형하자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붙었던 것.] 무게추는 문치파[* 정확히 말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인 요도기미 파.]인 미츠나리 쪽이 유리했으나, 마에다 토시이에가 1599년 3월에 사망하면서 반전되었다. 이때를 틈 타 [[가토 기요마사]] 등이 모의하여 자신을 암살하려 하자 이를 감지하고 탈출, 그렇게나 증오하는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혼비백산한 미츠나리가 혈혈단신 이에야스의 집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메이지 시대 이후에 쓰인 자료에 의한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으로 [[거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파격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카사야 카즈히코는 2000년에 '도요토미 일곱 장수의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사건 - 역사인식 형성의 메카니즘과 그 함정'이란 칼럼에서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망간 것은 근거없는 속설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칼럼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저택이 아니라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농성했으나 이후 이에야스의 중개로 인해 부교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에야스로서는 눈엣가시인 미츠나리가 제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나, 당장 미츠나리를 제거하기보다는 더 큰 이익[* 도요토미 파의 분열과 자신의 인망 쌓기]을 위하여 미츠나리와 무단파 인물들과의 화해를 중재한 뒤, 이시다 미츠나리를 안전하게 사와야마 성까지 배웅하게 된다. 실제 그를 배웅한 인물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서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전에 [[사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서 후시미성으로 도망, 무단파 무장들과 대치하던 와중에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에야스의 도움을 받아서 무단파와 화해 아닌 화해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대가로 무단파의 요구인 [[오봉행]]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결국 토시이에의 사망에 이어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도요토미 세력의 유력인물인 미츠나리도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만들었고, 이에야스는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미츠나리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통하여 [[우에스기 카게카츠]]과 밀약, 우에스기가에서 군사를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모리 데루모토를 맹주로 앉히고 이에야스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